버선본
윤동주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1936.12
일제 강점기라서, 있는 것도 없지만, 그 남아있는 것에서 현명하게 아껴 쓰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바라보며 시를 쓴 윤동주나 어머니의 사랑과 현명함이 담겨있는 시를 세세하게 보자.
◆ 종이도 사치이자 아껴야 했던 시절
(1연)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윤동주 시인이 살던 시절은 지금처럼 종이를 구하기 쉬웠던 것은 아니다. 학용품은 비쌌고, 사치였다.
계산서, 갱지, 습자지 등 비록 종이 품질은 낮지만,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마구 버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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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어려운 그때 윤동주 어머니는 누나가 쓰던 습자지를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습자지라 하더라도, 글을 연습하는 종이가 될 수도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사용할 수도 있고, 무언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글 연습이야 모래마당에서도 할 수는 있지만, 보일러는 다르다. 지금은 버튼 하나로 방이 따뜻해지지만, 그때는 아궁이에 불을 때려면 나무나 종이를 넣어야 하는데 나무보다 종이가 훨씬 잘 탔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 소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지만, 윤동주 어머니는 왜 습자지를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을까?
◆ 한 장의 습자지는 버선본이 되어
(2연)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기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그에 대한 답은 2연에서 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도 어느 날 궁금증이 생겼는지, 일상 속에 어머니를 관찰했을 것이다.
그 결과, 어머니는 윤동주 시인의 버선본을 만드는 데 습자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몽당연필은 왜 남기셨나요
(3연)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절약을 확실하게, 알뜰하게, 현명하게 하는 어머니는 습자지에 멈추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이 공부하다 남은 쓰기 불편한 몽당연필도 남겨두었다. 윤동주 시인은 또 의문이 생겼다. 엄마는 왜 저걸 또 남기셨을까?
◆ 다 써가는 몽당연필은 분필이 되어
(4연)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또 어머니를 관찰했더니, 자신의 버선을 만들기 위해 천 위에다 분필 대신 몽당연필을 이용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옷수선이나 미싱 재봉용 분필(영어로 '초크'라고 함)이 나와서 세제나 물에도 잘 지워지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한 물건이 없었을 것이다. 있다 한들, 비싸거나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어렸을 때 특별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던 따스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 추억이 떠오르면 아련함과 그리움도 느낄 수 있는데 윤동주 시인 또한 그러했던 것이 아닐까.
일상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가득 느낄 수 있던 시 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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