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942.5
이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씁쓸해졌다. 다들 자기의 인생에서 너무나도 그리운, 다시 돌아가고픈 '구간'이 존재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도 마찬가지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한 구간을 정거장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일단 시를 자세히 보도록 하자.
◆ 모든 시작은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1연)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윤동주 시인의 시를 보면, 윤동주 시인은 봄과 아침이 자주 나온다. 왜냐하면 이 소재는 새로운 시작, 싱그러움, 사랑이 피어남, 따스함, 밝음, 설렘 등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서울의 어느 조그만 정거장이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서 기다린다. 그래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안타깝게도 희망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둘 다 이루지 못한다.
◆ 시작은 시작일 뿐, 시작이 좋다하더라도 결과는 모르니까
(2연)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기차역에서 윤동주 시인은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간신한'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 간신히 : 겨우 또는 가까스로.
- 1) 간장과 신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간신艱辛하다 : 힘들고 고생스럽다
여기서는 '겨우' 혹은 '가까스로'라는 의미가 담겼을 확률이 높다. 보통 그림자는 걱정, 근심, 역경, 고생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많이 긴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긴장감을 풀기 위해 윤동주 시인은 담배를 피웠다.
지금은 플랫폼에서 담배를 피면 벌금을 물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개념은 없었다. 혹시나 싶으니 참고...
◆ 담배 연기마저도 그림자를 싣고
(3연)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자기의 그림자, 즉 근심과 걱정은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린다고 했다. 담배를 피운다 한들, 그 걱정, 근심이 어디로 사라질까?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그대로 고여있다. 단지, 그 행동을 함으로써 긴장을 살짝 풀어보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기차역에서는 비둘기들이 날아다닌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기차역에서 비둘기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더 흔하게 보였을 수 있다. 비둘기들이 날아가는데, 그 날개 사이로 햇빛을 비춰 날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끄러울 것도 없이'라고 표현을 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려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윤동주 <서시> 중 -
비둘기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리고 온몸으로 따스한 햇빛을 받아들인다. 그 햇빛을 날개 하나하나에 비친다.
즉, 윤동주 시인은 시대 상황과 맞지 않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지금이야 공부하러 일본 간다고 하면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누군가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둘기 보고 '부끄러울 것이 없겠구나' 싶은 것이다.
◆ 희망을 가져보지만, 오히려 멀어지는
(4연)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 없이 자신을 멀리 데려다주었다. 희망이 가까운 듯 보였으나 멀었던 것이다. 분명 시작은 서울이었지만, 자신이 도착한 곳은 다음 연에 나와있다.
◆ 그리운 계절은 떠나버렸다
(5연)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윤동주 시인이 도착한 곳은 동경(도쿄) 교외(도시의 주변 지역)였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문학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일본으로 온 것이었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있으면 한국(조선)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로 유학 가지 않았을까 싶다.
시작과는 다르게 윤동주 시인은 '봄은 다 갔다'라고 한다. 처음 시작했던 마음과 현재 자신의 마음이 달라졌다. 조용한 하숙방에서 윤동주 시인은 옛 거리에 남은 자신을 그리워했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날들이 있지 않는가. 윤동주 시인은 고향도 그립지만,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그 플랫폼에 서있던 자신을 그리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반복되는 일상 표현
(6연)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윤동주 시인이 기다리는 소식은 오늘도 도착하질 않았다.
◆ 그래도 그 계절을 기다림
(7연)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가차운 : 가찹다 : 가깝다 (강원, 경상, 전라, 제주, 충청, 평안 방언)
그렇지만 윤동주 시인은 포기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정거장으로부터 가까운 언덕에서 왔다 갔다 할 거라고 한다. 소식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 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맞는 거 같다.
◆ 젊음이여, 안녕
(8연)
-아아 젊은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그때가 그립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처음 소망하고 시작했던 마음을 다시 되새기면서 다시 마음을 굳게 잡는다. 그 희망을 절대적으로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으라는 말로 끝을 낸다.
이 시를 해설하면서 나도 그리웠던 계절들과 시간들을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토요일 학교 끝나고, 햇살 쨍쨍할 때 친구들과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면서 하교를 했던 날, 집에 돌아오면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낮잠을 자던 나날들, 다시 볼 수 없는 가족들과 보냈던 시간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평범하게 살아온 나에게도 너무나도 그리운 나날인데, 윤동주 시인에게는 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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