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평생 공부다/윤동주 시 해석

무서운 시간 - 윤동주 해설, 그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이 HanE 2022. 8. 1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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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간 - 윤동주 해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화상 p.59

무서운 시간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


원래 휴가 전에 게시해 두고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해설하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아쉽게도 며칠 지나서 올리게 되었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3가지 뜻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종교적인 부름, 두 번째는 같은 민족의 부름, 즉 독립운동가들의 부름, 세 번째는 탄압이 크게 일어나면서 일본 순경이 자신을 향해 부르는 두려운 부름이다.

 

 

  •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해설 /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싸우자는 관점에서 본 해설 / 일본 순경이 불러 두려운 부름으로 본 해설
  • 공통적인 시 해설 부분

 

◆ 종교적인 의미의 부름

 첫 번째, 종교적인 부름이라 생각하고 해설했을 때다. 윤동주의 종교는 기독교였다.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같은 종교였다.

 

 기독교에서는 누가 신인가? 하나님이다. 정확하게는 삼위일체인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예수, 그리고 옆에서 일하는 성령을 말한다. 절대적이며 권능자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람을 부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살아가는 동안 즉 소명이다. 지극히 작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소명일 때도 있고, 때로는 가정, 때로는 지역, 때로는 나라, 때로는 세계로 향한다. 윤동주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슴을 태울 듯한 열정이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다 하려면, 목숨을 바치는 순교도 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사야 또한 톱으로 순교당했다. 그 외에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들 또한 순교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윤동주 시인도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실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이 핍박과 순교당했다는 사실 지극히도 명백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십자가>나 <팔복>, <서시> 등과 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가랑잎은 활엽수의 마른 잎을 말하는데, 떡갈나뭇잎을 보통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 하나였다. 처음 들어본다면, 도토리 열매가 나오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쉽다. 흔한 나무 아래면, 아마 산에 빽빽하게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나 햇살이 희미하게 틈 사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 틈 사이에 아직 호흡이 남아있다고 한다.

 

 전지전능한 신 앞에서 사람은 굉장히 작은 존재다. 먼지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앞에 사람이 선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라고 말한다. 희미하게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손을 들지도, 하늘을 표할 곳도, 자신을 둘 하늘도 없다고 표현한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소명이 끝나는 날, 자신이 죽을지 알기에 세상에는 자신이 없어져도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라며 시간은 흘러간다고 표현을 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시를 쓸 당시 만 23세였다(생일 지나기 전이므로). 23살이면 얼마나 젊은가. 지금으로 쳐도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할 나이다(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다. 기독교 계열 사립 전문학교로 현재는 연세대학교를 말한다.).

 

 그래서 윤동주는 마지막에 두려운 마음으로 '나를 부르지 마오'라고 신에게 소심한 반항과 부정을 했을 수도 있다.

 

 

◆ 같은 민족의 부름, 독립운동가들의 부름

 두 번째, 같은 민족이 부르는 것이다. 즉,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윤동주 또한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그 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이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활발하게 시를 썼던 시기는 전쟁에 빠져있는 일본이 조선을 더 강하게 탄압하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든, 문화로든 다 힘든 시기였다. 모든 철은 일본이 전쟁에 쓸 자원으로 훔쳐갔으며, 먹을 것이 없어 굶고, 한국어 사용 금지에, 창씨개명까지 강제로 하게 되었다. 같은 민족이지만, 나라를 팔은 매국노들이 감시하며 보고를 해, 독립운동하던 이들을 더 못 살게 괴롭혔다.

 

 윤동주 또한 한 몸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면, 남아있는 가족들과 자신이 꿈꾸던 시인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어떻게 죽었다 하더라는 소문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일제의 탄압으로 어둠(그늘)만 가득한 이곳에, 윤동주 시인은 숨 쉬고 있었다. 이때 하늘은 더없이 높은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 예를 들자면, 일론 머스크가 내가 너를 안다며 악수를 하자며 먼저 요청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유명인사나 대단한 사람이나 있을 하늘인데, 시만 쓰는 자신을 뭣하러 부르는지 소심하여 손도 못 든 자신을, 유명한 지인이 없는 자신을 왜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을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은 시를 쓰는 소명을 마치게 될 때에 어김없이 죽임을 맞이할 것이고, 자신이 죽어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부르지 말라고 한다.

 

◆ 일본 순경이 자신을 부를까 봐 두려운 부름

 다른 해설에 비해 보이는 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해설이다. 독립에 대한 시를 쓰면서 혹시나 걸릴까 봐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 살아갔을 것이다. 혹시나 일본 순경이 자기를 부르게 된다면, 자신이 아니길 빌 것이다. 막막한 어두운 현실(그늘)에 늘 조심스레 목숨을 겨우 부지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늘 스스로를 부정하며, 하늘을 향해 맹세하지도 못하고, 땅만 보는 자신을 부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윤동주 본인의 소명인 시인의 삶은, 죽음을 맞이하면 끝날 텐데, 그리고 자신이 세상이 떠난지도 모르고 세상은 잘 흘러갈 테니 자신을 부르지 말라고 한다. 이 시대에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삶을 살아갔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 <무서운 시간>을 3가지로 해설해 보았다. 주관적인 시 해설이므로, 교과서나 모의고사 등에서 나오는 해설과는 다를 수 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한 것이므로 참고만 바란다.


-편집 프로그램 : 미리 캔버스

-사용한 글꼴/폰트 : THE명품명조2R

+2023.12.19 글꼴 및 글꼴 크기 수정, 가독성을 위한 글 내용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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