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
십자가는 윤동주의 종교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시다. 앞서 윤동주 시 소개를 하면서, 윤동주의 종교를 말한 적이 있는데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다. 그렇기에 윤동주 시에 종교가 묻어나는 시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요새는 교회를 한 번도 안 나가본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들 먹고살기 괜찮아져서일 수도 있다.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한 끼를 제대로 못 챙겨 먹는 학생들도 있어서 종종 교회에 나온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교회에서 일요일 혹은 토요일마다 모여서 성경 공과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진 추세다.
예수, 십자가가 무엇인지, 예수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잘 몰라서 시에 대한 깊이가 잘 안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예수 :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중 하나로, 성부, 성자, 성령 중 성자다.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났다. 유대인들이 활동을 금하는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늘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으로 신고를 하여, 최고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사망했다. 예수는 모든 이의 죄를 대신 감당하여, 구약 성경에 제사를 올리는 '양'처럼 대신 피를 흘렸다. 이에 대한 단어로는 '보혈'이 있다.
-십자가 : 십자가형 틀모형으로, 기독교의 상징이다.
이제 이 설명들과 시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1연)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것이 햇빛이었는데, 지금은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다고 한다.
왜 교회당 꼭대기라고 표현했을까? 현대 교회 건물을 생각해 보자. 교회 꼭대기에 뭐가 있는가? 대다수 십자가다. 윤동주 시인이 교회당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교회 건축물에도 십자가가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는 닿기가 쉬울까? 물론 닿을 수는 있지만, 쉽게 되진 않을 것이다. 즉, 십자가는 닿기 힘든 곳에 있다. 닿기 힘든 것을 사람들은 보통 무엇을 빗대어 말하는가?
바로 목표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느껴질 때, 저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
(2연)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독립을 위한 운동을 계속 하고 있으니, 일본은 곧 굴하고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늘 안고 살다가, 갑자기 더 심해진 통제와 억압으로 인해 더 멀어진 것이 눈으로도 보였기에 답답했을 것이다(1941년 기준).
(3연)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종교를 딱히 심하게 억압하지 않았다. 단, 한일병합조약(1910년) 강제 체결 후로 신사 참배를 장려당했다. 신사 참배란, 일본의 신토 신앙을 바탕으로 만든 종교시설에서 신사를 참배하는 종교의식을 말한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로, 일본은 기독교 성직자들에게까지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음란한 짓(우상 숭배하는 것을 의미함)이라고 하며, 죄는 다 같으나 우상숭배는 비교적 큰 죄로 취급했기에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의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굴하는 교회들(기독교-천주교, 개신교 등을 포함시키는 포괄적인 단어)이 생겨났다. 이에 끝까지 거부하던 교회, 장로교회가 있었지만, 많은 고초를 당했다. 대략적인 종교(교회) 탄압 시기로는 1937~1938년부터였기에, 윤동주 시인이 활발하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랬기에 교회 종소리도 함부로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휘파람은 예로부터 딴청을 피우거나 적막함을 해소하려고 불기도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휘파람을 불며 교회 근처에서 서성거렸다고 했다. 그 말은 즉슨,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와 땀, 목숨까지도 내어드리리라 다짐했을 텐데, 희망도 꿈도 없어져 가는 현실에 과연 내가 희생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생각보다 더 큰일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4연)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여기 문구에서는 괴로웠던 사나이는 예수를 칭한다. 그러나 바로 뒤 문구에서 행복한 예수라고 말한다. 괴로웠다고 하다가 갑자기 행복하다고 표현을 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가 모든 이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죄를 사하여 주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왜 그러한 권능이 있었을까?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와전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행위적인 종교의식만 추구하고, 정말로 가난하고 맘이 아프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음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을 것이다.
예수는 그가 스스로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까? 정답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했다(마태복음 26:39, 외 사복음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이 그 속죄제의 양처럼 희생당했다. 흠없는 어린양(죄 없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라리,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되게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와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 더 없는 행복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형받았을 때, 그가 마땅한 죗값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을 뿐, 그가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깨달은 이들이 많아졌고 그 복음을 전하며 나누는 이들(제자)이 생겨났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 위해, <서시>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고백했을 수도 있다.
(5연)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는 어쩔 줄 몰라하는 3연과는 사뭇 다르게 5연에서는 완전히 당차게 선언한다.
어찌할지 몰라 방황하던 자신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드리겠다고 하며, 자신의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하늘이 어두워질 때쯤, 아무 불도 켜지지 않는 곳이라면 얼마나 보일까? 거의 안 보인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어도 어두워서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굳건한 다짐이 보인다.
원래 8일에 올려야 했던 해설인데, 몸이 아파서 하루 늦게 올리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은 나름 다른 시인들에 비해 해설하기가 쉬운 편에 속한다. 종교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시만 아니라면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십자가,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지은 <십자가>를 비교하면서 읽었을 때, 전달이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설을 했다. 해설을 읽고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다.
-이미지 사진 : 라이센스 보유(한이-본인), 문창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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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글꼴 변경 및 크기 변경, 썸네일 추가 및 내용 추가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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