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을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조지훈의 <사모>는 KBS 다큐멘터리 2015년 8월 23일 방송에 '어부 건배사'로 마지막 연인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로 유명하다.
◆ 후회도 미련도 없을 줄 알았지만, 되돌아보니 사랑에는 늘 할 말이 남아있다
(1연)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지훈 시인은 애달픈 사랑을 한 사람 같다. 왜냐하면 첫 시작부터, 사랑을 다해 끝냈지만, 뒤돌아 서니 자욱한 추억들이 떠올라 사랑을 다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상대에게 전하려고 하지만, 상대에겐 이미 새로운 사람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 사랑은 타이밍이다.
그리고 요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로는,
-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지 말자.
곁에 있을 때는 이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소중한 사람인지,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 버리기 전에는 항상 그 사람이 곁에 있을 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 왜 '잃어지고' 있었다고 표현했을까?
(2연)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새들이 구애할 때 노래를 부르듯이, 화자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뜨거운 노래를 불러주고 싶지만, 가슴으로 삭히고 있다. 이제는 불러줄 수 없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 당신은 멀리 떠나가버렸다.
- 당신은 멀리 떠났다.
- 당신을 잃어버렸다.
- 당신을 잃었다.
위와 같은 능동 표현들이 원래라면 맞지만, 조지훈 시인이 이를 몰랐을까. 나 또한 가끔 그런 식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오랜만에 작품을 그리고 싶어 졌을 때, 붓에게 잡혔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조지훈 시인 또한 잃기 싫은데 잃어지고 있기에 표현하지 않았을까?
◆ 마지막을 아름답게 끝내고 싶었던 그대
(3연)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보통 이별을 할 때 해맑게 웃으며 헤어지는 경우는 잘 없다. 연인들이 헤어질 때 가지는 기분은
- 슬프거나
- 화나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연에서는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이라고 했다. 헤어지는 분위기가 막 슬프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보면,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만 보아도,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가난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구슬프게 써 내려가 있다. 하지만 반면, 조지훈 시인의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 각자의 길을 위해, 가장 무덤덤했을 때 헤어지자고 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고는 상대방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길 바란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은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닐 수 있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자 조지훈 시인은 슬픔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 외로움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큰 병이다
(4연)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을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결코 사회적인 존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도생으로 잘 살아남았을 테니.
조지훈 시인의 외로움이 얼마나 큰지 비유해 준다.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서 나오는 그 피로, 오선(악보에 그어져 있는 5선을 의미)을 그려 본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이라고 했지만, 이미 화자는 외로운 상태다. 그러고 밤에 울어 보리라고 했는데, 앞서 2연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는데, 사랑의 노래가 아닌 애곡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울어서 멍든 눈흘김'은 누구의 눈가인지 유추가 필요로 하다. 화자 본인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웃으며 이별을 고하던 여인의 눈가일 수도 있다.
첫 번째 가정인, 화자의 눈이라면, 자신을 매정하게 버리고 간 그녀가 미워서 눈물을 훔치며 눈물 자욱이 남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과거에 그 모든 것을 사랑했던 자신이었으므로, 밉지만은 사랑한다고 했다.
두 번째 가정인, 떠나버린 그녀의 눈이라면, 머릿속에 아마 그녀의 모습이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도 사랑하면서 왜 자기를 버리고 가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는,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가 정말 밉지만 밉지만은 않은 않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한 잔이 여러 잔이 되고, 가슴은 불 타오르고
(5연)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유명한 마지막 연. 한 잔은 너를 위해,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한 잔은 초라해진 나를 위해,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해.
술을 그냥 마실 수도 있지만, '건배'도 하는 편이다.
- 건배 : 1. 술잔의 술을 다 마셔 비움. 2. 술좌석에서 서로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건강 또는 행운을 비는 일. (네이버 국어사전)
건배 단어 뜻을 보면 알다시피, 축하하거나, 건강 또는 행운을 빌 때 하기도 한다. 아마 조지훈 시인은 한 잔씩 건배하는 느낌으로 마시지 않았을까?
떠나버린 너지만, 건강하길 바라며, 이미 끝나버린 너와의 사랑이지만,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한 축하,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해 행운을 비는,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해 축하.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지훈 시인의 종교는 '불교'다. <승무>라는 시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가 이 시에서 '하나님'을 언급했을까? 박목월 시인의 영향이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왜냐하면 박목월 시인과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였고, 시를 주고받을 정도면 서로의 사상이나 종교도 깊게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성경에서는 모든 일들과 만남은 '필연'이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만남이든 이별이든 다 '필연적인 발생'이다. 그랬기에 조지훈 시인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이라고 언급했을 것이다.
사랑에 관련된 시를 해설할 때마다 참 어렵다고 느낀다. 모순적이면서도 이중적인 마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마치 밉지만 좋고, 좋은데 미운 그런 느낌?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다뤄지는 주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별하거나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이게 제 3자로 보았을 때나 쉬운 일이지, 막상 당사자에게 일어나면 세상에 정말 이보다 어려운 일이 없다고 느껴진다. 이 시를 써 내려가면서, 조지훈 시인은 또 이 시를 위해 한 잔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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