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지도
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것이냐, 네 쪼꼬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1941.3
내가 지금까지 해설한 윤동주 시 중에 이 시가 가장 한 문장의 호흡이 길다. 운문이라고 해야 맞을까, 산문이라 해야 맞을까. 연 단위로 끊을 수가 없어서, 시의 호흡이 끊기는 거로 나누어 해설할 예정이다.
제목만 보았을 때, 지도가 그 지도일까 아니면 아니면 ~(할) 지도일까 생각하다 시를 끝까지 읽고 나서 알았다. 길을 찾기 위한 지도구나.
지도는 알다시피, 길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눈 오는'을 붙였다. 왜 눈 오는 지도라고 했을까? 어느 지역에 눈이 내려서 붙인 것일까? 아니면 지도 위에 눈이 온다는 뜻일까?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여기서 나오는 '순이'는 <사랑의 전당> 시에서도 한 번 나온다. 윤동주 시인이 홀로 사모했던 여인의 이름이다. 완전한 짝사랑.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마음에 박혀버린 사람이다. 하지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은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떠난다는 소식에 청천벽력이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는데 사라진다니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사람은 너무 슬퍼지면, 말보다 흐느낀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침부터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린다고 표현을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마음이 얼마나 먹먹해졌을까.
비가 내릴 법도 한데, 비가 아닌, 차갑게 눈으로 내린다. 그것도 함박눈으로 내린다. 그런데 그 눈이 감정을 가진 것처럼, 슬프게 창 밖에 있는 지도에 덮인다고 했다. 창 밖에 정말로 지도를 깔아서 한 말이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윤동주 시인이 말하는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자기 마음속에만 있는 '자신이 상상하는 순이'가 아닌, 실제로 순이와 만날 수 있었던 장소를 의미한다. 길가나 교회 등, 만날 수 있던 추억의 장소를 의미한다. 더 이상 그 지도에서는 순이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 지도가 있어도 더 이상 지도가 아닌 것이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은 방 밖을 내다보았다. 사모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지만 방 밖에 이제 아무도 없으니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방안에도 텅 비어버린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보통 하얗다는 표현은 어디에서 쓰일까. 맑고 순수하고 밝은 이미지일 때도 있지만, 허무할 때도 쓰이고, 아무것도 없을 때, 텅 비었을 때, 해탈했을 때 등 무언가가 없는 느낌일 때도 쓰인다.
윤동주 시인의 슬픈 마음은 방 밖에 떨치고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마음속에도 가득 차버렸다. 홀로 사모했던 그 마음이 생각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꼬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정말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 다시 되묻지만, 그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고 참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영영 볼 수가 없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로 떠나는지도 모른다. 궁금한 것도 많지만, 그 누군가에게 묻지도 못할 일이다. 그녀가 보고 싶지만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윤동주 홀로 그녀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그녀가 떠나간 자리는 봄도 오고 여름도 오고 가을도 오고 겨울도 온다. 앞으로 윤동주 시인은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녀와 함께 있었던 장소와 시간을 그리워하고 회상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제 눈은 마음의 창 밖이 아닌, 마음속에 내린다.
윤동주 시인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이 흘러도 그녀를 추억하며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마지막 문장에서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를 보고 요새 유행하는 말들인 "꽃길만 걷자"라는 뜻인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축복해 주는 말인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사람에게 냉정해진 현대 사회에서 사람으로 예를 들어도 감정이 와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이 많아진만큼, 반려동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반려동물을 잃어버리거나 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 없이 한 없이 자신의 사랑과 애정을 줄 수 있는 존재였는데 갑자기 어느 날 사라져 버린다면, 그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 끝은 아쉬움, 허무함, 허탈감, 슬픔 등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 깊이 올라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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